심장을 부둥켜 안고 홍명희 나의 신이 나에게 그러하였듯이 청청한 어둠을 뚫고 나는 당신에게로 달려 간다 고장난 괘종시계의 추처럼 어느 샌가 멈춰 서 버린 당신의 차가운 심장을 안고 봄날 추녀 끝에서 녹아내리는 고드름처럼 나의 사랑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어디쯤에서야 사랑을 박차고 떠난 당신의 차가운 심장과 나의 뜨거운 눈물이 만날 수 있을까 나의 신이 나에게 그러하였듯이 푸른 달그림자 가슴에 안고 나는 당신에게로 달려 간다
층간소음 홍명희 바위처럼 납작해 지려면 얼마를 더 견뎌야 할까요 시끄러워 파도가 밀려오려나 봐요 걱정은 개에게나 줘 버려 오랫동안 기었더니 무릎이 동그랗게 되었어요 바닥이 당신에겐 딱 어울려 그런데 가끔씩은 모래 부스러기 땜에 목이 막혀요 재채기를 하지 마 불가사리가 놀랄 수 있어 마스크를 하면 괜찮을까요 비말을 거르듯 기침소리를 가려줄 지도 몰라요 초인종 소리에 대답 하지 마 옆집 여자의 뒤꿈치를 쳐다보니까 당신 눈이 점점 돌아가고 있어 윗집 여자도 가자미가 되었나 봐요 어제부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요 이제부턴 기지개를 켜는 대
천지연 폭포 홍명희이제 나는아래로 뛰어 내린다수만 능선과 골짜기를 타고 넘으며애오라지 간직한 천혜향 같은 사랑을 품고목젖까지 꾹꾹 눌러 담은 그 이름 석 자가지 끝에 앉은 눈 먼 까마귀의 속울음을 함께 보듬고깊고 푸른 가슴으로 뛰어 내린다둥둥 떠다니는 한 뼘의 하늘과눈물로 질척이는 한 줌의 땅이천년의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푸르른 연못그 오랜 절망의 방황을 끝내고비로소 낙하하는 환희의 절정안개가 나를 둘러싸고한라산도 등 뒤에서 나를 안는다귤꽃같이 하얀 웃음이 나를 보채고부서지며 절규한다 마침내 물살이 되어 너의 한 가운데로 투신한다한
말랑말랑한 오후 홍명희 검은 비가 내린다 낮은음자리처럼 어린 고양이의 흔들리는 눈빛으로 담긴다 해 질 무렵 축축한 몸을 발목에 기대던 아슬아슬한 체온이 떨어뜨린 떨림의 음표가 베란다를 적신다 뜨거움을 제어할 유실된 점프의 기록 어린 고양이 울음처럼 야옹야옹 담겨지던 숨 가쁜 발소리 차가워진 커피의 온도를 타고 씁씁한 커피 향이 찻잔의 무늬 속으로 숨는다 고양이 울음 속에 커피콩 볶는 소리를 살그머니 던져 놓는다 뜨거운 담장을 오르기 위해 수천 번 추락하고 나동그라지며 익혔을 저 말랑거리는 표정과 잦아드는 숨소리 낡은 베란다의 커피
포도 홍명희포도 한 송이 선물로 받았습니다당신 눈망울처럼 까맣게 윤이 납니다포도송이를 바라보며 망설입니다당신이 내민 포도는 어쩌면 조금 떫거나 조금 시큼해서내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몇 날 몇 일 바라만보다포도 한 알을 따서 입안에 넣어봅니다상큼하게 터지는 과즙이온 몸에 퍼져나는 금세 어린아이처럼 포도 단맛에 잠깁니다두 눈을 감고 포도를 깨물면어느새 나는 초록빛 무성한 포도밭을 달려갑니다울퉁불퉁 구부러진 가지 위로 부드러운 손길처럼 포도덩굴이 휘감기며 뻗어갑니다당신의 눈빛이 머문 곳마다 포도송이가 자라납니다당신의 손길이
그리하소서 주여 홍명희그리하소서 주여!나의 하나님이 되소서저 질척거리는 늪잔학과 멸시가 끊이지 않는 고통의 땅날카로운 채찍과 고역으로 인해아이들의 웃음마저 사라져 버린 참혹한 땅애굽의 사슬에서 건져 내소서당신을 위해 나를 만드신 존귀한 주님나를 위해 에덴을 지으신 사랑의 주님유월절 피 바른 문설주마다어두운 그림자 건거가게 하시고허리에 띠 띠고, 발에 신 신고온 밤을 이겨낸 거룩한 입술마다주님 예비하신 거룩한 땅젖과 꿀이 흐르는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소서그리하소서 주여!당신의 큰 손으로 날 건지사당신은 오로지나의 하나님이 되소서인애하신
자화상 홍명희하늘빛이 그리워 강가로 갔다기운 옷을 벗어 던지듯묵은 껍질 훌훌 벗어 버리고알몸이 되어 물속으로 들어갔다더 깊이더 낮게강바닥을 딛다가차가운 강둑에 부딪혔다나무와 꽃과 바람과해와 달과 별이차가운 강물 속에나처럼 우두커니 잠겨 있다
또 하나의 월드컵 홍명희2004817한국과 말리 축구 예선전식탁 위엔 과자 몇 봉지와 잘 익은 포도 두어 송이플라스틱 컵 다섯 개와 포크가 쟁반위에 가지런히 놓여있고코카콜라와 양념치킨 한 마리를 배달시킬배춧잎처럼 푸른 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살구색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파들파들 떨며 경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띵똥찰카닥 문이 열리고와 하는 군중들의 술 취한 함성이 남자와 함께 집안으로 밀려 들어 온다아직 경기 시작은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커다란 축구공 같은 발 하나가슉슉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하우스키퍼의 늑골 아래로 날아 든다잠시 얼
닭장 홍명희곡소리가 울려 난다 해그 집에선꼭두새벽부터꼭꼬댁 꼭꼭암탉이 울지꼭꼬댁 꼭꼭꼭울어대는 암닭의 울음 소릴 비집고꼭끼오~~회를 뜨고 회를 치 는 수탉의고함 소리가
거미 홍명희웃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 위에투명한 사다리가 놓여 있다금방 알에서 부화한 햇거미 들이여덟 개의 다리를 이끌고 사다리를 오른다속이 훤히 들여다뵈는 말간 핏줄들한 칸 한 칸 오를수록거미의 몸집이 커지고 색깔이 짙어 진다마디마디가 굵어지고독기처럼 뾰족뾰족 솜털이 자란다다 자란 솜털이 거미줄이 된다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빛나는 훈장들꼭대기까지 올라간 거미는온 몸에 칭칭밧줄보다 굵은 거미줄을 휘감고방향을 틀어 아버지에게로 수직낙하 한다어버지 얼굴이 어느새거미의 몸빛을 닮아있다
아침 홍명희 그녀가 바다를 삼키고 있었다그녀의 입 속으로파도가 빨려 들어가고불가사리 몇 마리미역 몇 줄기옆으로만 걷는 입에 거품을 문 게들도빨려 들어갔다틈틈이 등이 굽은 새우 몇 마리의 요통도 함께 삼켜졌다투명한 눈빛의 해파리가 내뱉는 연한 독들도빨려 들어가고물컹거리는 여덟 개의 문어 다리도머리와 함께 통째로 삼켜졌다간밤에기울어지는 팽목항의 물살에 맞춰힙합을 부르던 아이들의 높은 꿈자리표도 삼켜지고새벽을 깨문 그녀가계단을 밟고 올라가주인집 여자보다 먼저 널어놓은 흰 빨래들의펄럭거리는 소리도 삼켜졌다목련 나무에 하얀 신호등이 삼켜졌다
저울 홍명희비탈에 놓인 평평한 저울그녀 앞으로 기울어진다일 원짜리 동전과 백 원짜리 동전을 올려도깃털로 만든 공과 쇠로 만든 공을 올려도상식과 비상식의 자장면논리와 비논리의 비빔밥을 올려도저울은 그녀 앞으로 공손하게 엎드린다가마솥에 고아 만든 갱엿 한 사발나무 끝에 매달린 구름 한 종지썩은 간의 끈적거림과 날간의 생생함을 올려도어김없이 그녀의 치마폭으로 기울어 진다대체. 이건. 무슨 저울?저울의 밑면을 들추어 확인한다오, 글로벌한 상표그로테스크한 네임은 메이드 인 시ㅡ월드그녀의 이기적인 저울 앞에서나의 지구는 별로 쏟아져 내린다.
꼬랑지 홍명희꼬랑지 하나가 실룩이는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밀고 간다엉덩이 뒤로 쏟아지는 구린내를 밀치며와이퍼는 움직이는 꼬랑지엉덩이를 가리기엔 꼬랑지가 제격이지엉덩이 위로 누더기처럼 파리 떼가 날아 든다파리 떼를 향하여 내려치는 날카로운 굉음꼬리는 순식간에 채찍이 되어 제 살 위에 시퍼런 멍 하나를 남긴다멍을 두려워해서야 파리 떼를 떼어 낼 수 없지내버려 두면 몸속을 파고 들어구더기를 슬고 마는 파리 떼온 몸에 멍을 남기며 파리 떼를 낸자랑스런 엉덩이속을 다 비워낸 엉덩이가꼬랑지를 매달고 갈귀를 흔들며광화문 광장을 춤 추듯 걸어간다
유리꽃 항아리 홍명희천둥소리 벌거숭이 살에 흘러 내렸다벼락같은 한숨 소리 어린것 울음 따라속으로 파고 들고왈그랑 달그랑 그릇 부딪치는 소리들기름에 덖은 미역국이 끓어 넘친다친정 어밀 닮은 게지여자를 바꾸면 아들을 낳는단다까무룩 잠 든 사이노랫가락 흘러가듯 이어지는 푸념별이 쏟아지고아비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옹알옹알 벌어지는 조그만 입술탱글탱글 대추알처럼 익어 간다꽁무니에 방울 달 듯허리춤에 얹혀바람개비 껴안고 살아 온 날들너는 벼락을 몰고 내게로 왔지천둥을 품고 달려왔지가슴 속 뜨거운 초유를 먹고가을이 토해 낸 단풍으로 웃는다국화
빗살무늬 그 여자의 집 홍명희 시인말을 혀 밑에 감출수록 집은 점점 어두워졌다어두워질수록 단단해 지는 벽들벽들 사이에서 호흡이 무디어졌다어둠이 밀고 오는 저녁이나 밤혹은 그 밤이 뿔을 숨기는 희미한 새벽이 빈 집을 두드린다검은 뿔이 돋아난 성난 머리가 담의 여기저기를 들이 받는다출구 없는 집입구마저 가난했던 유난히도 좁은 집어린 고양이의 눈빛도 들어 갈 수 없다입구를 찾기 위해 아무렇게나 휘갈긴 사인들이 외벽에 가득하다출구를 찾기 위해 긁어댄 손톱자국들 빗살처럼 선명하다빈 집에 그녀의 몸이 담긴다팔십 평생의 몸을 여니 빈한한 가슴
배꼽 그 혼란한 매듭 홍명희삶은 배꼽에서 얽힌다한 점의 기억으로 의식은 싹이 튼다어머니의 살결이 비릿하게 녹아 있는 양수 속을 헤엄치며살점 하나하나 만들어 가던 고요한 집중기억은 경험의 둘레를 벗어나지 못한다저울추를 통과하지 못한 언어의 기억은 혼란을 일으켜 세운다혼란을 빚어내는 정제 되지 못한 언어의 기억들은배꼽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 내장 속으로 비린내를 풍기며 파고든다꿈틀거리는 내장 안에서삶을 유린하는 은밀한 음모들이 익어 간다짓눌린 기억은 돈벌레의 섬세한 바퀴처럼 배꼽을 향해 기어든다미로 속에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혀로 핥은
사과 (호자에게) 홍명희 슬픔의 가지 끝에는 둥근 얼굴이 매달려 있다그 얼굴에는 오 촉 전구 같은 꽃향기 속에서 마구마구 떠들던 어린 꿀벌들의 붕붕거리는 소음이 담겨 있다가지가 하나 덧대어 질 때마다아마도 나무는 입덧을 했으리라시큼한 위액을 목젖으로 밀어 올리며 힘차게 팔다리를 버둥거렸으리라가지 끝 초록 이파리엔그의 얼굴이 일평생 걸어가야 할 세심한 운명이빗금처럼 단단히 매달려 있을거야빗방울은 요란스레 투둑거리며 그 길을 지우고이를 악문 잎들은 밤새 떨면서 그 길을 지켰을거야길이 끝난 허공에서 몸 안 가득 열기를 받아들이며 홀로 뜨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 때 홍명희첫눈처럼 당신은 내게로 온다칙칙한 어둠의 통로를 지나남루한 원룸의 세입자처럼재생봉투에 담긴눌린 삼각김밥이나마요네즈가 듬뿍 얹혀진 차가운 컵밥으로 온다이름을 잃어버린 내가하루종일 “이모” 혹은 “저기요” 로 불리워지는 동안가난한 나는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불판 넘어 저쪽에 있을 어느 평평한 대지를 상상해 본다초록벌판을 달리는 꼬리가 예쁜 조랑말이거나 눈빛이 고운 사슴이거나그 사슴의 뒤를 쫓는 갈기가 아름다운 한 마리의 젊은 사자로 내달린다아 그래 그런적이 있었지줌마댄스를 추며 고래고래 괴성을 쏟아내며 마법의
걸레-어머니의 자리 홍명희대추나무에 아버지의 연이 성글게 걸려있고아이들은 연을 내리려 고양이처럼 지붕 위로 올라갔다지붕 위엔 고양이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내려다보면담 밑에서 꼬물꼬물 기어가는 벌레들의 웃음이 보이고그 웃음의 꼬리를 물고 따라가는 햇병아리들의 종종걸음이 보인다부채표 활명수가 나란히 꽂힌 화단에는키 작은 채송화가 어린 강아지와 눈을 맞추고작은 꽃잎을 눈에 담은 강아지는 마당을 가로질러분홍빛으로 뛰어 다닌다그 마당 한 쪽에 펌프질하는 아버지의 굵은 팔뚝그 옆에서 산더미 같은 빨래를 헹구는 어머니의
고백의 기도 홍명희내 주여 당신은어둠 속에 스며오는 햇살이었습니다오! 나는 가시밭에 앉아 울던 죄 많은 목숨여호와의 선한 베푸심으로낮고 깊은 골짜기까지 들려오던 빛해를 안고 자라나는 나팔꽃처럼작은 손 올려 뻗어 솟아오르다당신의 품 안에 안기었으니여기 꿇어앉은 겸손한 양 한 마리당신의 넘치는 영광 위해 목을 베소서오 주여 정녕당신을 위한 삶으로 죽게 하소서당신을 찬미하는 끝없는 노래로내 혀와 입술이 마를지언정당신의 기쁨 위한 촛불로 타리이다한 번, 두 번, 또 한 번세 번씩이나 주를 외면한 이 어리석음주여 어찌하오리까오, 주여! 어찌